디자이너는 무엇을 위해 밤을 새우는가
article 2008/08/20 20:30
7월호 <월간 디자인>에 기고한 에세이에 대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 어린 인사를 건네온다.
아마도 '밤샘'이라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글 자체에 대해서도 좋은 평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꼭지를 담당했던
월간 디자인 최태혁 기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 하다.
초고 상태에서 원고 분량이 넘쳤는데 그의 '집요한' 요청에 따라 정교하게 글자 수를 맞추어 줄여가다 보니
아주 간결한 상태의 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역시.. 글은 간결할수록 감칠맛이 난다.
말도 글처럼 '편집'을 해서 뱉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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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이너는 무엇을 위해 밤을 새우는가 ]
일과 속 디자이너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지만 집중력을 방해하는 그 무엇이 늘 그들을 괴롭힌다. 거래처로부터의 전화와 미팅, 팀원들 간의 회의 등이 작업과는 별개의 흐름을 만들며 교란한다. 그 산만함을 제어할 힘을 갖지 못한 채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퇴근시간. 저녁을 먹고 좀 더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빨리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만 7시가 넘어갈 무렵엔 결국 ‘야근’을 결심한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엔 육체의 구속을 대가로 한 정신의 자유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동을 한다. 쫓기지 말자. 어차피 야근할 거, 느긋하게 하자. 떳떳하게 한 두 시간 채팅과 웹서핑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10시. 이때쯤엔 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12시 전에는 퇴근을 하자고 마음을 먹어보지만, 겉마음과 달리 속마음은 이미 12시를 넘길 채비를 하고 있다. 한동안 몰두하여 작업을 하다 보면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은 방식에 대한 호기심이 들기도 한다. 여유를 갖게 되었으니 좀 더 잘해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작업은 쉽사리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혼란에 빠지게 되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천적인 문제의식조차 희미해진다. 바로 이때쯤 정신을 따르려는 육체의 의지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종일 혹사당하여 휴식이 필요해진 육체를 상대로 한 정신의 가여운 투쟁은 ‘잠’이라는 절대권력 앞에 투항하고 만다.
모니터 앞에 굴복자세로 엎어져 잠이 들던, 머리받침이 없는 의자 등판에 목이 뒤로 꺾여 항복자세가 되어 잠이 들던, 시간은 흘러간다. 서슬 퍼렇게 밤을 밝히는 형광등 불빛은 잠든 이의 잠들지 못하는 의식을 괴롭힌다. 깨어나 일을 하라고. 하지만, 정신은 이제 완전한 무저항 상태에 이른다. 2시. 무의식 중에도 의식은 도무지 육체를 깨워 일으킬 수 없음을 안다. 4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의식은 재빨리 육체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다. 9시 미팅에 맞추자면 7시까지는 마무리해야 옷을 갈아입고 올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서둘러야 한다. 어젯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모색의 과정을 찾아 한참 벌여 놓았던 작업의 상태를 재빨리 수습해야 한다. 최상은 아닐지라도 최선의 상태로나마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6시. 마음은 급한데 창 밖은 어느새 아침.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밤샘작업’을 생각하지 않고는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는, 예나 지금이나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업계의 가슴 아픈 현실을 대변해준다. 나 역시도 밤새는 일에 대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고 긴 세월 무수히도 많은 밤을 새워왔다. 밤을 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숨이 턱에 차듯 일이 늘 바쁘게 돌아가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그 외에도 집중력이나 작업진행 능력이 아직 부족한 이유,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충분히 휴식하지 못한 이유이다. 잠이 부족하기 때문에 작업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작업의 완성도가 떨어지다 보니 좀더 시간을 투자하기 위해 또 밤을 새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단골 김밥집 아주머니가 우리들의 잦은 야근을 염려하기에 무심코 “아주머니는 야근 안 하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아주머니가 야근까지 하며 김밥을 싸실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대답은 내 뒤통수에 일격을 가하듯 충격적이었다. “밤새면 손맛이 써져서요.” 김밥집 아주머니가 손맛이 써져서 김밥의 맛을 망칠까봐 밤을 새지 않는 동안 디자이너들은 무엇을 위해 그 많은 밤을 새왔던 것일까. 디자이너들이 새워온 수많은 밤은 도대체 디자이너의 무엇을 망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요즘 여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 6~7시간 정도를 꼬박 잠을 위해 투자하고 있다. 4시간 이상 자는 것을 수치로 여기며 ‘늘 깨어있는 삶’을 자랑으로 알던 그간의 삶을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나라는 디자이너가 아무쪼록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정신이 나의 육체를 위해 이제야 무언가를 기여하고 있는 게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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