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classtalk 2008/10/04 10:34
개천절. 주말의 여유가 하루 더 생겨 모처럼 넉넉해진 마음으로 남편에게 하루의 계획을 물으니,
오늘의 일정은 대략 '각자 따로따로'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이런저런 볼일을 보고 저녁 약속까지 이어질 모양이고
'지킬과 하이드' 공연을 준비 중인 딸은 일요일 이외에는 연습이 계속된다고 하니
오늘 하루 고스란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아싸~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중엔 온전히 '회사' 중심으로, 주말엔 온전히 '가족' 중심으로 시간을 나누다 보니
'나만을 위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라.. 오늘은 '하이퍼링크 놀이'를 벗어나 거리로 나가기로 한다.
오랫만의 쇼핑. 그것도 좋겠다. 봄부터 내 가방 속에 굴러다니느라 나달나달해진 백화점 상품권을 소진하기로 한다.
전철을 타고 학교 앞을 지나다가 문득 락현이 생각이 났다.
두어 주 전에 강의실에서 잠깐 마주치며 조만간 번개를 치기로 했던 일이 생각이 나 문자를 보낸다.
"오늘 저녁. 시간이 어떠할지..?"
시간이 가능하다면 오랫만에 만나 락현의 그간의 지내온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시간이 가능하지 않다면..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할 것이다.
불현듯 생각이 날 때 치는 번개.
만나게 되면 너무도 기쁠 것이고,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번개의 매력이다.
만남의 인연을 위한 베팅이라고나 할까.
나는 번개놀이의 이와 같은 속성을 사랑한다.
"문자만으로도 반가운 선생님.
오늘 제 여자친구와 헤어지기로 한 날이어서..
조금 늦은 시간이어도 될까요?""
"흠.. 많고도 많은 날 중 네 이별의 날에 번개를 치게 되다니 묘한 일이로군..
아무튼 보기로 하자."
여자친구와 이별이라니.. 위로가 필요할지 축하가 필요할지 잘 알 수가 없다.
요즘 아이들 말로 'update'가 자주 되어야 할텐데
내가 알고 있는 락현의 근황은 한 2년 전이 가장 최신이니 할 말이 없는 셈이다.
늦은 시각 만난 락현의 얼굴은 밝았고,
유효기간이 다 된 관계에 대한 연인들의 cool한 이별의 지혜에 대해 한 수 배운다.
락현은 1학년 때 처음 만나 군대, 휴학 등을 거쳐 다시 4학년에 만나게 된
나의 학교생활 중 가장 감회가 깊은 순간을 선사한 제자들 중의 하나이다.
입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생기를 잃은 대학 1년생들에게 '꿈'을 되찾아 주기위해 시작했던
'집단공연'의 추억을 나눌 수 있는 나의 어린 친구들..
스물 한 살 청춘의 싹이 막 피어오를 시기에 처음 만나
스물 일곱 성숙한 청년이 되기까지 그들의 빛나는 성장의 순간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선생으로서, 선배로서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선생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자로 배달된 어린 친구의 살뜰한 인사를 받는다.
"오늘 하루만으로도 안녕.
언제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
너무 긴 시간이 흘러가버리기 전에 다시 번개를 칠 수 있기를 바라며 어린 친구에게 인사를 보낸다.
